그 언젠가 강의 중 뜬금없이 그렇게 말했던 스승을 나는 잊지 못한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드라마에서 나왔다는 대사를 인용하며 그게 바로 공감이고 사랑이라고 담담히 강의와 일절 상관없는 얘기를 하던 스승에 나로선 아, 그렇군요. 그저 그때에는 뭣도 모르고 머리에 박혀버린 기억.
그런데 살다보니 정말 그렇다. 나를 대입해 내가 저 생명이라면 어떨까 몰입하고 존중해주게 될 때가 오더라. 그때 비로소 사랑이 뭔지 알겠더라. 비단 그 사랑이란 건 단일한 무언가에만 향하는 건 아니더라.
성애가 없이도 충분히 이어지는 어떤 연민, 책임감,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 무한한 지지, 그리고 미안함.
선민의식과는 다르다. 단지 이 세상에 우연히 태어나 힘들게 끙끙 살아가는 너에게 나는, 역시나 같은 처지로 공감하고 도움이 돼주고 싶을 뿐이다. 너를 이해하고 싶다.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너와 나는 전혀 다른 각 개체니까.
그러나 머나먼 옛날에 우리는 세포를 공유하고 진화를 거듭해왔다. 그렇게 우리는 같았던 존재에서 달라져 지구 안의 비슷한 생명이 되었다. 단지 살아남고자 발버둥치는 약하지만 강인한 생에의 지향으로 살아가는 자.
나는 그런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를 사랑한다. 충만한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같았었기에 다름을 인정할 수 있고 다르기에 또 같을 수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이분법의 초월.
이 연민으로서의 사랑은 실로 완전무결하다. 결코 우리가 하나 될 수 없음을 전제로 한, 사실 그대로의 것을 적시한 바기 때문이다.
이같은 진실을 적시하지 못했을 때 사람은 사랑에 거창한 미사여구를 들이붓고 그것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음에 혐오와 원망과 공포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와 네가 같을 수 없다는 절대불변의 진리를 외면한 상태로 쌓아올린 일방의 감정은 자기와 타자를 향한 허무맹랑한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누구라도 잔혹한 이 약육강식의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건 아닐테다.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살아간다. 살고 싶어서. 특별한 이유는 없다. 태어난 이상 누구나 살고 싶어한다. 삶에의 의지. 그 의지는 타자에게 연민과 더불어 미학적 감동 ㅡ 다시, 각자의 영역에서, 그러나 대지 위에서 함께 살고픈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우리는 타고난 허무에 허덕이면서도 행복이 뭐고 사랑이 무언가 생각하고, 느끼며 계속해 나아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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