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그늘’ 아래 우회적 마비 그리기
― 편혜영, 『사육장 쪽으로』 ―
이제까지 편혜영에 관한 비평론은 주로 ‘그로테스크 미학’이나, 허무라는 핵심어로 요약되어왔다. 또한 이처럼 요약되는 핵심어의 맥락을 일상에 대한 작가의 시선, 즉 세계 자체의 “섬뜩함”을 바라보는 작가의 ‘현실적’ 시선에 주목하여 접근 ․ 정립하는 경향도 있다.1) 요컨대 기존 비평은 창작자 편혜영의 생산물로서 작품을 현실주의라는 이념형으로 포괄해버렸다고 할 수 있겠다.
본 글은 이러한 편혜영론에서 한 발자국, 조금 더 내딛어 그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넓혀보고자 시도하는 글이다. 현대의 작가들이 흔히 그렇듯 그녀 역시 개성에 따라 단일한 성격 내지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의 창작자인데, 필자는 그러한 문학적 표현의 단일성이 내재한 보다 구체적인 본질과 특이성에 대해 새삼스레, 그러나 새로이 분석해보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 고로 본 글은 상대적으로 그로테스크, 허무, “섬뜩하게 보기” 외에도 도시와 개인 이라는 지점이 주로 부각되는 한편 그렇듯 읽히는 단편모음집 『사육장 쪽으로』(문학동네, 2007)를 비평 텍스트로 삼는다. 인간의 휴식, 평온을 침식해 들어오는 도시일상을 주로 드러낸 소설들이 실린 본 작품집은, 다루는 내용으로 인해 기존의 비평과 유사한 선에서 해석이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보다 파헤쳐 볼 만한 여지, 즉 도전의 가능성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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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시 그늘’에 구속되다 : 「소풍」과 「첫 번째 기념일」
「소풍」과 「첫 번째 기념일」은 각각 『사육장 쪽으로』의 서장과 종장에 배치된다. 이 같은 배치가 출판사의 얄팍한 수미상관 전략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자와 연인 사이인 남자가 함께 가는 하루 여행길에서 맞는 기괴한 사고(事故 ․ 思考)를 그린 「소풍」, 리모델링을 앞둔 허름한 아파트에 사는 여자에게 물건 배달을 하는 택배직원(남자)의 심리를 그린 「첫 번째 기념일」은 모두 남/녀의 서로 다른 시각으로 내용이 전개된다는 점에서 다소의 개연성을 지닌 듯 보인다.
「소풍」의 주인공인 여자가 연인의 억지에 못 이겨 피로를 억누르고 교외인 W시로의 1박 여행을 가는 데서 우리는 최근 유행하는 주말여행을 엿본다. 여자는 문예창작학과 출신으로 대학에서 배운 글쓰기 기술을 학원의 논술 강사로서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본래 아이들을 좋아하는 그녀였지만, 학원에서 아이들이 상장을 받게 하기 위해 대신 글써주는 일을 하기도 하는 그녀는 그러한 아이들을 싫어한다. “모든 문장을 일인칭 주어로 시작하는 아이들이”, “버릇없게 구는 아이들을 무관심하게 지켜보는 자신이”, 심지어는 “아이답지 않은 표현과 졸렬한 표현을 오히려 칭찬하는 자신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순수해야 할 아이들이 되레 순수성을 결여한 현실, 현실에 타협해 그러한 아이들을 외면하는 여자의 모습은 기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부러 피하는 현대인의 기만적 나약함을 비춘다.
반면 여자가 다니던 대학의 축구선수였던 남자는 지금은 강변의 아파트를 짓는 건설노동자다. 금방 학원업무를 마쳐 피곤한 상태인 여자를 곧바로 데리러 와 마트를 들러 밤부터 W시로의 여행을 강행한 남자는 먼 여행길 대신 근교에서 “대하나 좀 먹었으면.” 하고 바라는 여자에게 “대하야 여기서도 처먹을 수 있잖아!”라든지, 차 안에서 멀미하는 여자로 인해 열린 차창에 대해 “문 좀 닫아, 시끄러워 죽겠다.” 하며 소리치는 등 급한 성질을 지닌 권위주의적 인물로 나타난다.
이들의 여행은 남자가 바랐던 것처럼 그리 즐겁지 못 했다. 고속도로에서는 내내 안개에 시달려야 했고, 여자는 피로와 멀미에 힘겨워했으며, 그 와중에 탱크로리에게 위협적인 추격을 받아야 했던 데다가 중간에 뭔지 모를 생물을 치기까지 한 것이다. 소설의 결말은 그렇게 힘든 여행길을 그려줄 뿐 끝내는 W시의 톨게이트 앞에서 사고 후 아침을 맞이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쯤 되면 남자가 급히 바랐던, 그리고 그를 따라 여자 역시 억지로 바랐던 「소풍」은 오히려 지옥길에 다름 아닌 마냥 느껴진다. 이러한 위험과 공포의 급습은-‘고속도로’와 ‘탱크로리’라는 도시적이면서 이질적인 상징물을 통해 다가왔다 해도-, 그토록 지겨워하던 도시에서 그저 그런 일상을 보내는 게 낫진 않을까 하는 무미건조한 판단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한편, 「첫 번째 기념일」은 남자가 여자에게 배달해야 할 택배를 그녀가 집에 없었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로 계속 훔쳐낸 데서 이야기의 뼈대가 형성된다. 보잘 것 없는 학력에 이렇다 할 경력도 없는 그는 택배회사에 소속되어 일당 수입으로 먹고 사는 비정규직이다. 게다가 그나마도 물건취급소에 가입 보증금을 내고서야 가능한 직장이었다. 그는 구상-실행의 창조적 접합 과정으로서 노동의 즐거움 따위 맛볼 일 없이 다만 기계적으로 배달에 임할 따름이다.
그런 남자는 동창인 사진사가 사진 일을 그만둔다는 소리에 그에게 “보증금을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약삭빠른 생각을 하곤 사진사로 하여금 택배기사 일이 좋은 것처럼 포장해 권유한다. 최대한, “좋아하는 기색이 드러나지 않아야 했다.” 죄책감마저 느낄 새 없다.
남자가 훔친 물건들의 주인인 여자는 신도시 개발로 인해 공동(空洞) 상태인 지역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사는 곳이다시피 하다. 남자는 신도시가 완공되면 자신 역시 그곳 도시의 사람으로 보일까 싶어 달갑기도 하지만, 역시 그래봐야 반지하방을 전전하는 생활은 변치 않으리라는 예상에 “치욕”스럽기도 하다. 이러한 남자의 도시로의 편입 소망과 그것의 불가능성에 의한 상대적 박탈감은, 얼마 후 사진사의 몫으로도 일부 전이될 테다.
이후 남자는 훔친 배달물에 대해 직접 건의한 여자를 만난다. 여자의 일터인 도시 내 유원지에서 여자를 만난 그는 여태 다양한 배달물을 통해서만 상상하던 상대를 실제 보는 것에 기이한 괴리감을 느낀다. 같은 모자를 색깔만 바꿔서 두 개나 샀던 전적을 통해 ‘개성을 소비’하려는 여자의 허영심을 이미 알고 있던 남자는, 유원지의 관람차 시범운행을 도맡아 기구 운행시간을 기계적으로 체크하는 그녀의 노동생활을 조금은 반가운 듯 도시불빛에 비춰 살펴본다.
「소풍」과 「첫 번째 기념일」. 이 두 작품은 모두 커다란 도시에 피로한 몸을 기댈 수밖에 없는 여자와 남자의 생활을 다룬다. 잠시라도 도시를 떠나려 한 노력이 ‘도시적 거대함’을 지닌 탱크로리와 희뿌연 안개에 뒤덮인 고속도로로 인해 허사가 된 이야기를 다룬 「소풍」, 그토록 자주 맞닥뜨렸던 두 사람임에도 상호 낯설기만 한 택배직원 남자와 여자의 이상스레 설레는 유원지에서의 만남을 그려낸 「첫 번째 기념일」은, 고속도로와 유원지라는 도시 바깥의 ― 하지만 그 또한 도시의 일부일 뿐인 ‘도시 그늘’적 공간 내 남/녀 특유한 시각을 종합한 바다.
이렇게 도시에서 시작해 도시에서 끝나는 『사육장 쪽으로』의 서장과 종장은, 다루는 내용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도시 그늘’에 묶인 인간의 무력함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2. ‘인간-늑대’에의 갈증, 그 근원에 대하여 : 「동물원의 탄생」
다른 한편 동물원에서 탈출한 늑대를 잡기 위해 도시에 급속히 대중화된 사냥꾼(들)의 이야기를 그린 「동물원의 탄생」은, ‘자유 = 자연’이라는 무의식적 인식에서 비롯된, 그리고 그 같은 인식을 향한 인간의 파괴적 소유욕을 형상화한다.
평소 동물원에서 별 인기가 없던 늑대는 “사라졌기 때문에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쉬이 잡히지 않는 늑대란 사람에게 공격을 가하는 잔학한 동물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시내에서는 “늑대에게 물려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되기가 일쑤였다. 늑대를 잡아야 하는 당위는 그로 인해 지워지지 않았고, 당위는 사냥꾼들로 하여 도시 어딘가에 늑대가 있으리라고 ‘믿게끔’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인공 남자는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소시민이었지만 늑대를 잡기 위한다는 미명으로 결국 회사를 그만둔다. 이제 그에겐 늑대를 잡아야 한다는 소명밖에 남지 않았다.
사냥 기간 중 늑대 흉내를 내던 익명의 사내와 잠깐의 친분을 갖게 된 남자였지만은, “야생의 것이라곤 볼 수 없는 도시 사람들에게 동물원을 탈출한 늑대만큼 야성적이고 매력적인 것은 없었”고, 또 그래서인지 늑대를 “산 채로 가질 수 없다면 박제라도 해서 가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그는 홀로(또는 이따금 파트너쉽에 가담해) 늑대를 찾는 데 열중할 따름이다.
그런데 바람과 달리 남자가 총탄을 쏴 잡아낸 것은 늑대가 아닌 털가죽옷을 입은 예의 사내였다. 이때, 독자에겐 회사를 나오던 그에게 직장동료가 한 말이 자연 오버랩 된다. “멀리서 찾을 거 뭐 있어? 세상천지가 다 늑댄데.”
자본의 원리로 생기 넘치는 도시에선 야생 혹은 야성의 살아있는 실체인 늑대마저 수입하여 전시한다. 한데 가치가 매겨져 들여온 늑대는 소기의 목적과 달리 동물원을 탈출했을 때라야 대중에게 의미를 획득한다. 사라져야만 아름답고, 그렇기에 갖고 싶은 것. 도시의 늑대는 이미 대중의 인식처럼 자연의 생명이 아닌, 소유물로서 관리돼야 할 ― 그런 고로 ‘잃어버렸을 때에나 관심이 이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면 남자가 그토록 붙잡고 싶어 했던 것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밥줄인 직장까지 그만두고 도시의 밤거리를 배회하며 남자는 늑대를 어떻게든 ‘죽이거나’, 또는 그러함으로써 ‘가지고자’ 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죽여서 이루어낸 것은 늑대 흉내를 내던 아니, 어쩌면 진짜 늑대였을지도 모를 사내의 황천길. 이 때문인지 남자는 후에 자신을 사냥꾼이었던 적이 없다고 부인한다.
새롭지만서도 익숙한 삶의 목적이자 열망의 대상이었던 늑대는 ‘또 하나의 (소)자연’이자 ‘생명’이었던 사내를 살해함에 따라 남자 안에서 사라지게 된 성싶다. 그의 소명은, 어찌 되었건 달성된 셈이다.
3. ‘분열’적 개인의 울타리, ‘도시 그늘’의 실체 : 「사육장 쪽으로」
늑대가 아닌 개에 관련한 이야기를 다룬 「사육장 쪽으로」는 전형적인 도시인의 근교 전원생활을 표지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도시에서 자란 남자는 “밝힌 불빛” 때문에 도시를 “아름답고 포근”하다고 볼 정도로 도시생활에 익숙한 동시에 도시를 좋아하는 자다. 그런 그가 근교로의 이사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전원주택이야말로 진정한 도시인의 꿈이 아니겠느냐”는 누군가의 물음에서 비롯한다. 본디는 그리 흥미도 없던 것이, 타인의 별 것 아닌 질문에도 정말로 “자신의 꿈인 양” 느껴지게 한 바다. 그렇게, 주체의식이라곤 전연 없이 “레고블럭”처럼 죽 늘어선 근교로 집을 옮겨온 그였다.
가족을 데리고 근교에 사는, 일견 행복해 뵈는 전원생활을 일구어낸 남자였지만 그럼에도 남자는 파산을 맞이한 힘겨운 오늘, 현실에서 대해 “졸음이나 식욕, 성욕 따위도 시간을 지키며” 살아온 언제나처럼 도시의 직장으로 ‘피해’ 간다. 어쨌거나 그에게 “일상을 지키는 것은 중요했다.” 관료제적 하향 명령과 그것의 이행을 시간 맞춰 해나가기만 하면 되는 직장이란, 남자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현실 마취제’이며 일상을 ‘학습’시키는 중요 일과에 매한가지다. 그는 마치 컨베이어 벨트처럼 완벽히 규칙적인 매일을 도시 내 회사라는 공간에서 의무가 아닌 일상으로 이어가며, 또한 되레 그것을 원한다.
한편 남자의 동네 이웃들은 그와 같이 도시생활에 익숙한 도시인들이다. 그들 모두는 비슷한 집에 살며, 남자와 마주할 때는 유사한 인사치레와 함께 “제조품처럼 가벼운 웃음”을 내보인다. 남자 역시 그런 “질서”가 좋아 웃음을 내비춘다.
그러한데, 남자가 사는 전원마을의 뒷산 인근 사육장으로부터 풀려난 개가 남자의 집에 어떠한 전조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다. 개들은 남자의 자식을 순식간에 물어뜯어버리곤 떠난다. 언제나처럼 미소를 지어주던 이웃들은 정작 위급 상황에선 숨은 채고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려는 그의 물음을 받고서야 병원은 ‘사육장 쪽’이라고 다급히 알려준다.
처음 다친 아이와 가족을 싣고 병원을 향해 내달리던 남자의 차는 어느 새인가 병원에 가는 것인지 아니면 사육장을 찾아가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회피해오던 현실의 고통을 어찌할 바 없이 직면하게 되자 점차 억눌리고 모른 채였던 ‘분열’ 증세를 보이는 남자이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다른 전원마을 주민에게 병원의 위치를 물어봐도 ‘사육장 쪽’이라는 대답만이 돌아온다. “도시 전체가 사육장”이다.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사람과 개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하여 남자는 끝내 개 짖는 소리를 좇아 “사육장 쪽으로 가기 위해” 차를 빨리 움직인다. 지금 당장의 정신분열이 멎길 바랐던 탓인가. “그는 그들이 닿는 곳이 사육장 쪽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라는 절망의 의식도 없다. 다만, 이제까지처럼 바랄 뿐이다.
남자가 진정 도달하길 원하는 곳은 도시인가, 사육장인가? 아니, 애초 그는 정말로 도시를 벗어나 살아본 적이 있던가. 꿈꾸던 것이 있던가. 스스로 원하여 새로이 자리 잡은 전원이란 공간은, 그로 하여금 ‘도시인의 꿈’이라는 ― 만연한 사회 ․ 구조적 마취에 더욱 묶이게 한 ‘자승자박(自繩自縛)의 도시 그늘’이 아니었을까.
개에게 목줄이 있다면, 그에게는 ‘도시 그늘’ 그 자체가 목줄일는지 모른다.
4. ‘도시 그늘’이 위치한 자리 ― 유토피아로의 덧없는 시작점 : 「퍼레이드」
도시 그 자체를 포함해 고속도로, 교외의 관광지 W시나 전원마을 등 ‘도시 그늘’은 실로 다양한 모습으로 실재한다. 그러나 ‘도시 그늘’이란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소는 유원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물원이 있고, 놀이기구가 있는 곳.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 돈을 내고 들어오기만 하면 보고, 즐기며 일상을 벗어난 마냥 있을 수 있는 곳 말이다. 「퍼레이드」는 바로 유원지 U공원을 배경으로 한 소설로, “태어나자마자 공연을 위해 훈련된” 6마리의 코끼리들이 동물원을 탈출한 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동물원과 별개로 인형옷을 입고 그 캐릭터에 맞춰 연기해야 하는 K와 E, P, S는 으레 “서로 자기가 더 힘들게 살았다며 자랑하듯 아르바이트에 관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각자의 고생 따위란 단지 주위 허세놀음 하기에 적절한 이야깃거리일 뿐, 어떠한 공감이나 포용 같은 것은 없다. 이미 평소에 억지로 웃는 인형연기에 찌든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공감과 포용을 할 만한 기력 역시 없다. 이른바 ‘감정노동’만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코끼리들의 급작스런 탈출은 「동물원의 탄생」에서 늑대의 경우와 같이 U공원 측에겐 반짝 장사로 통하였다. 누구도 코끼리들이 탈출한 이유는 몰랐다. 코끼리들이 없어진 날은 실로 “특별할 것이라곤 없는 날이었다.” 일상의 일부였던 어느 날 코끼리들이 나가버린 바다.
그렇게 사라진 코끼리들은 훗날 대도시 한복판의 벙커에서 발견된다. 커다란 6마리의 코끼리들이 어떻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벙커에 들어가 있던 건지, 또한 들어가서는 어찌, 누가 벙커 밖의 낡은 쇠자물통을 잠글 수 있던 건지에 대해선 아무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돌아온 코끼리들을 위시한 퍼레이드를 예정한다는 U공원의 지시에 K와 E, P, S는 새로이 도착한 인형옷을 입고 새삼스런 감정노동을 해야 했다.
하지만 코끼리들은 다시 또 탈출한다. “저 소리 들리니?” K가 물었다. “어떤 코끼리는 나팔을, 어떤 코끼리는 큰북을 들고 있었다.” 코끼리들이 육중한 발걸음을 옮겨 어딘가로 향한다. K와 E, P, S는 앞장선 코끼리들을 따라 같이 이전의 ‘브레멘 음악대’마냥 악기를 연주하며 걸어간다. 불협화음이 일고, 4명은 그러한 소리가 좋아 유쾌히 웃는다. “그들은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도 어쩐지 생애 처음으로 웃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퍼레이드」는 이렇게 끝난다. 탈출, 벙커, 다시금 탈출. 소설에서 코끼리들이 어떤 방법으로 탈출해 벙커에 들어가 있었으며 재차 탈출을 하였는지에 대한 것 등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야말로 ‘환상적 글쓰기’랄까, 심지어는 코끼리들뿐만 아니라 K와 E, P, S라는 인물들 역시 특별한 계기랄 것도 없이 함께 유원지를 벗어나려 한다. 인간과 동물 사이 특유의 불협화음을 즐거이 연주하며, 유원지의 ‘바깥’으로.
이처럼 현실을 향한 옅은 반발이 돋보이는 「퍼레이드」는 환상적 글쓰기에 더해진 ‘열린 결말’로 인해, 더욱이 그 같은 반발의 주체로서 다만 6마리의 코끼리들을 내세운 고로 기실 ‘지금-여기를 떨쳐내려는 의지’만이 단순히 드러난다. 액면 그대로, ‘유토피아로의 덧없는 시작점’으로 그려진 유원지의 일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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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작품들이 수록된 편혜영의 단편모음집 『사육장 쪽으로』는 도시 내지 유사도시라는 ‘도시 그늘’적 공간 아래 위치한 인간 ․ 사회의 일상 문제를 조명한다.
각각 교외로의 1박 여행, 전원생활, 유원지로 나타난 소설의 배경은 일견 비일상적 지점을 다룬 양 보일 수 있다.2) 하나 기실 「소풍」에서의 연인은 짧은 여행길조차 고속도로(아스팔트길)와 탱크로리(자동차)라는 도시와 가까운 바들에 의해 좌절하였고, 「사육장 쪽으로」의 전원마을은 도시의 “레고블럭” 아파트들과 형태만 달리했을 뿐 기본 성격은 유사하였으며, 「첫 번째 기념일」과 「동물원의 탄생」 또는 「퍼레이드」에 그려진 놀이동산은 이미 도시에 스며든 ‘익숙하면서 특별한’ 자본의 기계적 전략지 중 하나로 드러날 따름이었다. 요컨대 과거에는 비일상적이었던 것들이 ‘도시 그늘’의 확장-변형된 공간 양상으로 말미암아 작금, 우리네 일상 자체로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작가 편혜영이 ‘도시 그늘’에 대해 일관된 (창조적) 숨결을 불어넣은 결과인 『사육장 쪽으로』는,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현실사회의 “섬뜩함”을 투시한 작가 자신의 세계관에 연원을 두고 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곧 어떠한 미래도, 대안도 없이 현재의 허무를 공허하게 바라본 결과가 위 작품들이라는 해석이다.
필자는 묻고 싶다. 작가가 그처럼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는, 다만 허무와 공허라는 핵심어를 통해 관찰할 뿐인 존재인가? ― 그러한 관찰자적 시선의 기저에는, 특정 기질이 자리해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자기물음을 바탕으로 필자는 『사육장 쪽으로』가-더하여 작가로서의 편혜영이- 내재한 미학적 관점을 ‘사도마조히즘의 미학’이라 이름붙이려 한다.3)
먼저 「소풍」을 보자. 그리 즐겁지만은 않은, 아니 오히려 기이한 긴장감으로 점철된 교외 여행길은 애초 남자의 억지에서 시작된다. 여자는 금방 마친 노동으로 노곤함에도 불구, 평소 비정규 건설노동자로 일하는 연인을 “조금 애틋하게” 느끼는 동시 남자와의 그러한 관계에 익숙하므로 강압되다시피 한 여행길을 차멀미도 참으며 순순히 따른다. 그러나 휴게소에서 만난 사내로부터 이른바 헌팅을 당한 여자는 이후 이상하리만치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젖는다. 다음 휴게소에서 다시 보자는 사내는 본인을 탱크로리 운전자라고 소개하였는데, 그런 그와의 만남 직후 휴게소를 떠나 얼마 안 된 때에 여자는 이제껏(혹은, 그때서야) “남자가 늘 자신의 말을 무시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연인에 대한 연민의 감정은 어느새 한 사내의 가볍고도 급작스런 접근으로 인해 미묘한 반발에 바로 미쳤던 것이다. 말하자면, 마조히스트에 마찬가지였던 여자는 일순 등장하였다가 사라진 사내의 존재로써 잠시간 새디스트 연인을 향한 전복적(顚覆的) 눈을 뜬 바다.
「첫 번째 기념일」의 남자와 사진사 간 관계는 조금 다르다. 택배기사 일을 하는 남자는 신도시 완공 예정의 ‘도시 그늘’에서든, 자신이 배달물을 건네줘야 하는 여자(고객)에게든 언제고 비정규 노동자로서 하위계층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다. 그러나 그가 하는 노동의 실체 혹은 정체 따위야 알 리 없는 사진사에게 남자는 거짓된 언어와 표정, 몸짓으로 자신이 선 계층에 사진사가 대신 설 수 있도록 무던히 노력한다. 그나마 자영업을 하며 표면상으로는 중간계층에 있던 사진사를 은밀한 사기로써 끌어내린 것이다. 현실에 그저 적응 ․ 굴복해올 뿐이었던 마조히스트 남자는 순진하다 못해 멍청한 사진사를 전복, 제 스스로 사디스트의 자리에 선다.
「동물원의 탄생」 또한 그러하다. 소유(욕)의 대상으로서 갈급되는 늑대는 기실 총이라는 근대적 살상 무기를 지닌 인간에게 있어선 한없이 약한 자연의 상징이다. “세상천지가 다 늑대”인 세상에서 남자가 유일하게 잡아 죽이고, 영원히 품을 수 있는 존재는 동물원을 탈출한 늑대밖에 없다. 늑대 외에 원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욕망하기란 불가한, 사회에서는 소시민에 불과한 남자이지 않은가. 「첫 번째 기념일」이 약자의, 약자에 대한 은근한 폭력을 드러낸 작품이라면 「동물원의 탄생」은 소유욕에 기생한 노골적 폭력의 전복적 전면화라고 볼 수 있을 테다.
한편 「사육장 쪽으로」와 「퍼레이드」에서는 현재와 미래에 관한 작가의 일정한 인식 · 맥락으로서 사도마조히즘이 비춰진다. 「사육장 쪽으로」가 ‘도시 그늘 = 사육장’에 대하여 분열적으로 인지 ․ 외면하는 즉 ‘현실에의 전적인 굴복’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퍼레이드」는 코끼리들을 내세운 이상향에의 막연하고도 의존적인 인간적 소망에 대하여만 초점을 둔다. 요컨대 각각 주체의식이 부재한 나약한 존재(마조히스트)들의 ‘절대적 굴복(「사육장 쪽으로」)/의존적 반발(「퍼레이드」)’이 명령 ․ 관리의 주체로서 사디즘적 인간사회에 대비된 경우다.
이렇듯 『사육장 쪽으로』 전반에 드러나는 개인과 타자의 가학-피학적 관계는 신형철 등의 해석과 같이 작가 자신이 ‘현실적’이어서 가능한 “섬뜩하게 보기”라고 하기엔 조금 어렵다고 판단된다. 까닭인 바, 이러한 편혜영의 세계관은 현실세계 위에 서있되 그로부터 유리된 ‘(피)전복자의 껍데기’를 우회적으로 유지하는 데 머물기 때문이다.
곧 『사육장 쪽으로』에 표상된 도시그늘을 둘러싼 ‘우회적 마비’로서 사도마조히즘의 미학이란, 그로테스크라는 문학적 표현 방법을 통해 단일하게 드러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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