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작가론과 문학교육≫
이선옥, 「한국적 칙릿의 특성-정이현 소설의 자기 풍자(2014)」요약
칙릿은 문화번역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장르이다. 여성의 성과 사랑, 결혼, 일, 우정 등 일상의 갈등과 성장을 다루는 특징을 지닌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소재면에서는 여성의 성과 사랑, 일과 일상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그러나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극도의 냉소와 어두움이 작품집 전체에 깔려 있다. 이 작품은 마치 밝음을 가장한 칙릿의 음화 같은 역할을 하고 있어서 함께 분석해 보면, 여성의 성과 사랑, 일과 우정을 다루는 칙릿의 여성성장서사에 대한 정이현의 관점과 한국적 변용의 한 예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칙릿의 생산과 붐의 시작은 2005년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MBC)의 큰 인기와 더불어 2006년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가 발간과 함께 드라마화(2008년 SBS) 되던 시기라 볼 수 있다. 칙릿은 2,30대 독신 여성들의 일과 사랑, 일상을 다룬 여성소설장르로 2000년대 초반 미국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가 한국TV에서 방영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칙릿의 장르적 특성이나 한국의 유입과정 등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이후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개봉되면서 칙릿은 한국독자들에게도 상당히 익숙한 장르가 되었다.
그러나 신드롬적인 인기는 브리짓 존스의 뚱뚱한 노처녀 이미지를 그대로 닮은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삼순 이미지의 인기 이후로 보인다. 칙릿은 이후 2008, 9년 정도까지 짧은 기간 붐을 일으키고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장르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여성들이 주로 읽는 일과 사랑, 일상의 이야기가 왜 그토록 문학적 반향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이 되고 있다. 그런데 왜 그토록 빠르게 칙릿붐이 사라진 것일까. 한국에서의 여성독자는 뉴욕의 캘리(<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솔직하고 꿋꿋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외환위기 이후 심화된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공감을 얻으며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2008년을 기점으로 대중적 관심에서 멀어졌다. 2009년 베스트셀러 칙릿을 원작으로 한 SBS김인영 작가의 2010년작 MBC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 등이 연이어 실패한 것이 한몫을 했다.
하지만 그보다 결정적인 쇠퇴의 배경에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불황의 장기화로 더욱 악화된 고용 현실이 작용한다. 기본적 생존마저 위태로운 상황에서 칙릿을 비롯한 자기계발서사들은 쇠퇴하고, 극단적인 서바이벌 서사나 힐링의 서사가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다. 특히 여성들은 남성보다 극심한 고용 불안에 시달리게 됐다. 지난 6년간 남성 비정규직 비율이 감소할 때 여성의 비율이 49%에서 53.6%로 증가했다는 한국노동연구원의 ‘2013년 비정규직 노동시장 특징’ 보고서 항목은 그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1)
고용불안과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으로 빠르게 밀려나고 있는 여성노동의 현실이 소비와 자기계발, 자기성장서사로만 설명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애초에 한국에서의 칙릿이 중심세계에 대한 모방과 욕망의 환타지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보면, 주변부 여성노동의 현실이 그 그림자로 배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욕망과 좌절의 양가적 감정이 정이현의 소설에는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2, 30대 독신 여성의 일과 사랑, 결혼을 둘러싼 욕망과 좌절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소설로 꼽힌다. 특히 우리나라 작가 중 드물게 서울 그것도 강남의 정서를 작품화하는 작가로 과잉된 소비사회의 욕망을 여성주인공을 통해 그려내는 데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그녀의 작품이 소비사회의 새로운 주체들을 그려내는 방식에서 한국적 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 드러난 포스트페미니즘은 젊은 여성들의 이상적 여성상이 페미니즘과 페미니티의 합 즉 성공, 존경과 함께 여성성을 수락하는 방식으로 구성되고 있는 경향을 반영한다. 수잔 더글라스는 이러한 새로운 여성상을 '각성한 섹시즘(enlightened sexism)'이라는 용어로 분석한 바 있다. 이러한 여성상의 등장에 대해 연애, 성, 일 모두 독립적이고 당당한 여성상을 제시하고 여성의 욕망을 충실히 재현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서구자본주의 세계를 모방하는 소비적인 삶을 무비판적으로 복제한다는 부정적 시각이 엇갈리는 것이다. 이것은 국경을 넘어서는 문화번역으로서의 칙릿이 근본적으로 가지는 장점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외국의 작품들 중 칙릿의 분위기를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영화나 드라마는 모두 백인 전문직 여성이 주인공이다. 그러나 정이현의 작품들은 이러한 욕망이 단순히 모방된 욕망이 아닌 내면화된 삶의 양식임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 욕망을 단순히 비판하거나 섣불리 계몽하려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부정에서 긍정의 세계로 나아가지 않는다. 답답하리만치 위악과 자기풍자의 세계를 순환하고 있다. 그러한 특징이 소비사회를 살아가는 현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판단된다.
정이현의 칙릿은 두 가지 특성으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는 중심모방의 욕망과 그림자조차 없는 헛것이라는 현실 인식이 팽팽하게 그려지는 작품세계이다. 둘째는 그 세계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몸을 통해 그 욕망과 그림자가 각인되는 인물들의 특성이다.
첫째 특성은 특히 그녀의 작품이대중적으로 성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는 이국적 분위기 혹은 탈국경적 스타일로 드러난다. 텍스트의 공간이 구체성 대신에 탈국경적이고 화려한 패스티시의 세계로 구성된다.
둘째는 여성의 '몸'에 대한 두 개의 관점인 육체자본과 매력자본의 관점이 팽팽하게 인물을 구성하고 있다. 이 두 개념은 여성의 몸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전통적 관점 즉 여성육체의 대상화, 상품화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이를 거부하고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기 자본으로 활용하는 새로운 관점의 대립을 설명해주는 개념이다. 인물들은 자신의 몸을 적극적 자본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또 주체정립의 장으로서 몸에 대한 자각 또한 버리지 못 한다. 텍스트의 공간구성과 인물구성의 특징을 분석해 보면 문화번역으로서의 칙릿이 중심세계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정이현 작품에서 주체구성의 문제는 ‘냉소적 주체’ 혹은 ‘나쁜 주체’라는 개념이다. 냉소적 주체란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알면서도 이데올로기 외부를 상상하지 못하는 주체라 정의할 수 있다. 이들은 그간의 페미니즘 소설들이 구현하고자 했던 성장하는 주체와는 전혀 다르다. 남성중심 사회의 허위의식을 벗고, 자신만의 오롯한 주체로 서고자 했던 기왕의 페미니즘 소설 인물들과는 달리 정이현 소설의 인물들은 남성중심 이데올로기의 완결된 수행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인물들이다. 위장된 가면을 쓰고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자신을 몸을 기꺼이 결혼과 신분상승의 도구로 사용한다.
또한 정이현 소설의 여성인물은 몸과 관련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여성의 매력자본을 증식시키고 활용하는데 적극적인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비사회에서 노동보다 소비가 더 그 사람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신인류의 인간형으로서 특히 여성들은 자신들을 가꾸고 매력자본을 키우는 일에 적극적이다. 칙릿이 주목한 여성주인공들이 이러한 소비주체로서의 여성들이다. 이들이 적극적으로 평가되기 시작한 배경에는 이들의 당당함과 솔직함, 자기결정권의 증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페미니즘의 영향 또한 자리잡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포스트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다움에 대한 재평가를 강조했고, 1세대 페미니스트들의 여성성 억압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여성성의 회복으로 남성중심사회의 가치 전복을 꿈꾸었고, 여성의 매력이 여성적 권력을 획득하는 자산이 될 것이라는 주장까지 등장하였다.
영국의 사회학자 캐서린 하킴의 '매력자본'(eroticcapital)이라는 책이 그러한 주장의 중심에 있다. 이성을 매료시키는 여성의 외모와 태도 즉 매력자본이 경제자본이나 문화자본, 사회자본 만큼의 이익을 창출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 저자는 부르디외의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 외에 매력자본을 추가하였다. 부르디외의 육체자본이 경제와 문화의 계층을 상징하는 종속적 개념이라면 하킴은 매력자본도 자산가치를 창출하는 자율적 가치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예인의 예나 여성의 성공 사례를 보면 실제 이성을 매료시키는 외모와 태도가 경제자본이나 사회자본 만큼의 이익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정이현의 인물들은 이러한 매력자본의 증식이라는 신념을 철저하게 수행하는 인물들이다. 매력자본의 증식과정과 의미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의 소설은 소비주체로서의 여성이 존재하는 방식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처한 현실은 무성찰의 역할수행일 뿐 사랑도 결혼도 성공도 돈도 아무런 감정 없이 교환되는 재화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냉소적 주체에게 풍자의 세계를 뚫고 나오는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정이현의 한국적 칙릿은 비극적 결말로 폐쇄된 세계일까. 매트릭스의 세계에도 현실의 그림자는 언뜻 언뜻 비치는데,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작품집에 특이하게 배치되어 있는 「무궁화」라는 작품이 그러하다. 동성애를 소재로 삼고 있는 이 작품에서 여성의 육체는 이념적 각인 효과 이전의 날것의 체험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여성인물은 자신의 육체를 어떤 무엇이 아니라 체험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대목이 묘사된다.
아랫도리로부터 생리혈이 왈칵왈칵 게워져 나오고 있다. 실내복 원피스를 배꼽까지 걷어 올리고 한 손을 팬티 속으로 집어넣는다. 생리대와 맨살 사이에 펼쳐진 네 손바닥, 그 위로 뭉클한 핏덩어리들이 쏟아져내린다. 따뜻하다. 꿈속에서 너는 창문 너머 펼쳐진 수만 송이 장미들을 보았다. 바람결에 하르르 몸을 떠는 선홍빛 꽃 이파리들. (133쪽)
자기 육체와 대면하는 이 대목에서 주인공은 생리혈을 공포도 더러움도 아닌 선홍빛 꽃 이파리들로 받아들이다. 자신의 몸과 대면하고 화해하는 것. 정이현의 칙릿이 어둠과 냉소를 담고 있음에도 언뜻 비치는 이러한 파격적인 자기모색이 있어서 냉소적 주체는 갇힌 세계를 빠져나올 가능성을 보여준다. 동성애인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도 몸은 너와 그녀의 놀이터이고 평화로운 장소로 경험된다. 기존의 남성중심 이데올로기에 각인된 여성의 몸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몸의 경험이 묘사되는 것이다.
우리 문학에서 상당히 파격적인 묘사로 생각되는 이런 대목이 정이현 소설의 한국적 칙릿이 보여주는 특징으로 판단된다. 모방의 세계에 갇힌 인물들이 맨얼굴의 몸과 만나는 것, 그리고 화해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폐쇄되지는 않는 몸의 경험이 정이현의 작품이 제시하는 현실인식일 것이다. 아쉽게도 이 작품 외에는 찾아볼 수 없어서 각인효과 이전의 몸 자체와의 대면이 가능할지는 이후 작품들을 좀더 면밀히 분석해보아야 할 것이다.
* 참고 기사자료
박근영,「낭만적 사랑과 한국 사회 성·사랑·결혼의 부조화」, 시사IN Live, 2008.12.29.
앤서니 기든스는 저서 <현대사회의 성·사랑·에로티시즘>에서 “낭만적 사랑은 개인의 삶에 어떤 서사의 관념을 도입한다. 이것은 숭고한 사랑이 가진 성찰성을 근본적으로 확장한 형식이다”라고 설명했다. 로맨스(romance)라는 단어에는 ‘이야기를 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낭만’은 역사적으로 ‘서사’적 요소를 담고 있다.
사람들이 타인의 로맨스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것도 ‘이야기’가 가진 매력 때문이다. 4년 전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정 아무개씨(39)는 이제야 ‘아줌마 모임’이 자연스러워졌다고 한다. “예전에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부들끼리 모이면 다른 사람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다. 몇 동 누구가 바람을 폈다는 이야기를 몇 시간씩 하는데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요즘은 정씨도 이야기에 집중하고 ‘만약 나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고 한다. 그녀는 “남이 불륜을 저지른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지만 사실 나도 키 크고 잘생긴 남자를 보면 매력을 느낀다. 다른 주부들도 속내는 다르지 않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기든스에 따르면 낭만적 사랑의 애착 속에는 숭고한 사랑의 요소들이 성적인 열정의 요소들을 지배하는 경향이 있다. 낭만적 사랑은 사랑에서 성을 분리하면서 새로운 방식의 의미를 부여했다. ‘미덕’은 단지 순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특별한 사람’으로 가려내는 특징이 된 것이다. 이 특별한 사람과의 사랑이 현실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단이 된다는 것은 낭만적 사랑의 대표적인 신화를 만들었다.
낭만적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혼은 서양의 근대화와 함께 나타났다. 근대 이전에는 결혼은 철저히 계급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근대에 들어와 개인의 영역이 확장되고 개인 의사가 존중되기 시작하면서 ‘낭만적 사랑’이라는 개인 감정이 결혼을 성사시킬 수 있는 요소가 되었다. 상대에 대한 성적 배타성을 제도로 인정하는 ‘결혼’이 성과 사랑을 합치시키는 요소가 된 것도 이때부터다. 함인희 교수(이화여대 사회학과)는 “현대사회에서는 사랑이 종교를 대신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개인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대상이 종교로 한정되었다면 차차 사랑이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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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된 여성의 부조리, ‘인형 되기’로의 택
ㅡ정이현과 『낭만적 사랑과 사회』론ㅡ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현 사회 내 여성자아의 나약함 그리기이다. 이는 흔히 속물성 또는 여성의 사적 욕망 극대화, 생존전략 등으로 해석되어왔는데, 그러나 그와 연관해 진실로 강조해야 할 것은 아마도 여성작가 정이현이 사회에 '융화'되고 '일상화'된 여성자아의 나약함을 어떻게 잡아내고 있는가에 대한 바일 테다. 까닭인 즉, 자아의 나약함이야말로 외적 체계 내지 물질에 대한 강박적 ․ 중독적 몰입과 타자화에 관한 가장 직접의 요인으로 작용하는 때문이다.
1. 비틀린 독립에의 야합적(野合的) 삶 : '인형 되기'를 택한 그녀들
하면 정이현은 사회에 융화 ․ 일상화된 여성자아의 나약함을 어떠한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나. 단편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그녀는 미성년자 여성에서부터 젊은 처녀 여성, 심지어 결혼을 준비 중인 여성 및 연인으로부터 유기된 여성 등 실로 다양한 사회적 맥락에 위치한 여성상을 다룬다. 이 때 주목할 만한 점은, 정이현이 그려낸 이 나약한 자아를 지닌 여성주인공들 모두 어떻게든 '자발성'을 내세우며 눈 앞의 현실에 세밀히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 중 「소녀시대」는 한 소녀가 외동딸로서 가족에 구속된 채임에도 불구 스스로 독립하기 위한 사적 행태를 그린다. "이인자"임을 강조하며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남다른 자부심을 지닌 국립대학 교수로서의 아버지, 지방양반가문의 고명딸로서 온갖 신학문이란 신학문에는 간보기를 마다 않으며 지적 허영심을 펼치는 어머니 사이에서 부모인 그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소녀시대」를 사는 '나'는, 그렇듯 철저히 사회적 권력―'학벌사회'와 '가문중심 사회'― 위에 뿌리내린 가정환경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수단으로서 성의 도구화를 취한다. 20세 "채팅녀 깜찍이"와 아버지 간 불륜 상황을 안 '나'는, '미래의 자기 안정'으로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 끝내 포르노그라피티의 스카우터에게 변태적 사진을 찍히기를 자진 택한 것이다(「소녀시대」의 줄거리).
표제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주인공 또한 자발적으로 자기의 성을 도구화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여자 몸이 "금 가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끝장나는 거야!" 라며 부모 자신의 속도위반 결혼경험에 따른 처녀성에의 훈계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여성주인공은 "엄마처럼 사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다짐하면서도 끝내는 자신의 처녀성을 부적(富的) 권력을 지닌 남자에게 조공하다시피 함으로써 그와의 '사회적 일체'를 꿈꾼다. 중산층임에도 강남의 19.5평 아파트 집으로 종종 '강남 이미지의 수혜'를 클럽 등에서 보는 그녀는, 그럼에도 "출발선" 자체가 달라 순수한 사랑이란 이름으로 쉬이 혼전 임신을 한 부잣집 친구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나는 혼자 힘으로 이 척박한 세상과 맞서야 했다. 진정으로 강한 여성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라고 되뇌는 수밖에 없는 인물인 바다.
그런데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위 두 명의 소녀/처녀 모두 자신의 독립을 위해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사회에 타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주인공은 부모와는 전연 다른 삶을 살기 위해, 곧 중산층이면서 보다 상위의 계층에 오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에서 '탈출'하기 위한 방편으로 부잣집 남성과의 결혼을 계획한다.
반면 「소녀시대」의 주인공은 그러한 독립('~로부터의 자유')의 대상으로서 명백히 부모를 상정한다. 이는 사랑하는 연상의 남자친구가 주인공의 부모님께 외제차를 탈 수 있도록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하는 대목에서 보이는 주인공의 민감한 대꾸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난…… 난…… 엄마 아빠한테 그런 신세…… 그런…… 신세는 지기 싫어. 죽어도!" (고딕 강조 : 필자)
강남/강북의 '구별짓기' 의식이 상당한 그녀에게 있어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남자친구로부터의 그러한, 어쩌면 사소할 수 있는 부탁에조차도 부모에게 굴종적 "신세"를 진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대단히 직설적이다. 요컨대 가족구성원으로서 부모의 사회적 권위는 인정할지언정, 부모-자식 간 관계는 이미 친족의 정(情)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권력-(표면적) 의존의 관계를 띠고 있으며 또 이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는 그녀의 의식을 드러낸 것인데, 이는 아버지의 불륜을 잠재우기 위해 거짓 납치극을 벌이던 때 그녀가 내리는 아버지에 대한 평가, 곧 "딸 김혜나를 공동 소유한 또 한 사람"이라는 평가의 대목에서 역시 분명히 드러난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의 도구화를 통한 이차적 이익(미래의 자기 안정으로서 가정의 평화/상위 계층 남성과의 결혼)을 노리는 그녀들의 독립 추구 모습은, 사회에 적극 대립하기보다 우회하여 다만 '비틀린 표면의 독립'―남성의 권력에 의탁하며, 그로부터 더욱 큰 자기안위를 향하는―을 구하는 현대 여성의 야합적(野合的) 삶의 양식을 반어적이며 냉소적으로 드러낸다.
2. 여성의 ‘고독’에 대하여 : 인형, 되기 싫거나 혹은 될 수 없거나
해당 소설집에서 「홈드라마」는 또한 결혼 직전 과정의 통속적인 복잡함, 즉 가문 대 가문의 미묘한 암투과정을 밟고 이전의 가정으로부터 다시, 새로운 가정(결혼)에 연속해 편입하는 여성을 그린다. 이는 비록 대중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본주의 사회 하 규격화된 결혼-가정의 연속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결혼에 의한 가정이란 여성 개인으로서는 외면적이나마 고독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다.
「홈드라마」와 달리 「무궁화」는 결혼 자체가 불가한 소수자의 사랑인 레즈비어니즘을 주제로 한다. 통속적 ․ 대중적으로 짜 맞추어진 거짓된 친밀성의 영역으로서 결혼제도에 비껴간(혹은, 대립하는) 여성의 진실한 친밀성으로서 레즈비어니즘과 그것의 좌절이 이에 드러났는데, 여기서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은 여성과 여성 간 계층적 불균등성에 의한 이성애 결혼의 선택/비선택의 차이, 그리고 앞서의 텍스트들에서 나타난 이성애와는 그 성격을 달리 하는 레즈비어니즘의 관계 양상이다.
먼저 전자의 경우, 서울에서 태어난 주인공 '너'는 학생 때부터 미술을 공부하며 대학 지원 당시에는 여대 응용미술 계열의 "대학생이 되거나 재수생이 되거나" 하는 선택지를 여유롭게 헤아릴 정도의 ― 또는 "지하철 사호선, 한밤의 텅 빈 테헤란로, 비 오는 날의 국립현대미술관"을 좋아하는 목록으로 규정할 정도의 상위 경제배경을 타고난 미혼의 레즈비언이다. 그런 주인공과 달리 주인공의 '그녀'(연인)는 "섬유공장이 있는 소도시 읍내의 간이식당"에 갇혀 살았던 하위 계층의 인물로 대비된다.
그땐 거길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어. 하긴 누군들 안 그렇겠어? 돈도 못 벌어오면서 목청껏 허풍만 떠는 아버지와, 대못을 삼킨 것처럼 늘 퉁명스런 어머니를 가지고 있다면. 읍내 새마을금고의 여직원이 되거나, 삼교대를 하는 섬유공장의 미숙련공이 되는 것밖엔 다른 길이 없다면.2)
열아홉 살에 처음 상경하고, "팔 년째 누군가의 아내"로 산 '그녀'에의 '너'의 회상에는 처음 '너'와 '그녀'가 단 둘이 만났을 때, 곧 '그녀'가 '너'에게 고백한 순간이 맞물린다. "결혼을 한 건,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야." 결국 지긋지긋한 가정을 탈출한 '그녀'였으나, 결혼을 통해 다시금 가정에 묶임으로써 사회적 약자이자 소수자인 자신을 보호하는 기만적이며 미약한 '그녀'이기도 하였다.
그러한데도 '너'는 여전히 '그녀'와의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너'와 '그녀'는 '그녀'가 사라지기 전 서로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에도 언제고 "흑백 사진의 프레임처럼 이 순간이 유폐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상호 섹슈얼리티의 항유 또한 계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레즈비어니즘의 관계에서 두 당사자에게는 어떠한 내적 압박감도 실재하지 않는다. 이는 '그녀'가 주인공 '너'와 닿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사라진 데 대한 '너'의 독백에서 온전히 그려진다.
당연하다. 계약이란 그런 것이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어기면, 다른 한쪽에서 응분의 조치를 취한다. 그녀와 너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으나, 어떤 계약도 맺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 너에게 알릴 의무는 애초부터 없었다.3)
애초 결혼이라는 계약제도에 따라 묶고/묶이는 사회의 통속적이며 대중적인 이성애 관계의 최종귀결지에 비해 레즈비어니즘은 오직 친밀성의 향유만이 존재한다. 사랑하고/사랑하는 관계의 불안정하나 보다 진실한 지속. 하나 이 같은 사랑은 애초 사회로부터 부정되는 불가능성의 상정이노라고 정이현은 결론짓는다.
두 여성은 공중변소 앞의 「무궁화」마냥 국가 ․ 집단으로부터 '관리'되고 하물며 기혼자인 '그녀'는 남편에게까지 속박돼 있다. 사라진 '그녀'를 찾아 '너'가 '그녀'의 집을 당당히 찾아가고자 하는 찰나, 남편에게 '그녀'가 폭력을 당하는 모습을 자연 상상하고 그리 하기를 포기하는 '너'의 모습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바깥'의 관계가 맞는 친밀성의 파멸과 그에 따른 '여성적 고독' ― 다시 말해 남/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오직 강요된 여성성으로써 고독을 맞이할밖에 없는 여성 개인의 고독을 내밀히 드러낸다.
이처럼 「무궁화」가 레즈비어니즘이라는 이방인 여성에 대한 사회의 암묵적 압박과 그로 인한 여성적 고독을 면면이 드러낸다면 「신식 키친」은 과체중 여성 개인의 설레었던 '그'와의 결합-동거와 그것의 좌절, 그리고 그녀의 강박적이나 항시 실패를 거듭하는 다이어트를 통해 '바비 인형' 같이 아름답지 못한 이성애자 여성이 어떠한 남성에게도 사랑'받지' 못해 고독한 또 다른 '여성적 고독'의 현실을 투시한다.
못 생겨서 사랑 받지 못 하는 그녀가 그에게 관심이나마, 함께 하는 시간이나마 '받을' 수 있는 방법이란 오직 그와의 동거 중 그를 위해 저녁상을 차리는 것이었으나, 이는 발달된 기계과학에 따른 「신식 키친」 ― 즉 여느 집 주방의 역할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3. 여성은 어떻게 인형이 되는가
위와 같이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 내 여성은 비틀렸더라도 독립을 위해 또는, 외면적 고독으로부터나마 피하기 위해 살아있는 '인형'이 되기를 택한다. 인형화된 여성은 산 채도, 죽은 채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주체를 잃어버리고 다만 현실에 적응하는 현대 여성의 균열된 자아상 자체일 뿐으로, 반면에 인형이 되기를 거부하거나 그조차도 승인되지 못한 여성은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여성적 고독'을 맛보는 수밖에 없다.
인형으로서의 여성이든 '여성적 고독'에 허무를 맛보는 여성이든 운명과 다름없이 얽어매는 여성에의 사회적 맥락 ․ 틀 앞에 ‘나약함’은 매한가지일 테지만, 그렇기에 정이현은 다만 전자를 반어와 냉소로써 드러낸다.
인형! 아름답지만 껍데기뿐인 그 여성의 독립과 자기안위에의 소망이라 봐야 다만 왜곡된 안정의 현시일 뿐임을…….
오오, 크리스티네, 얼마나 마음이 풀리고 행복스러운지!
돈이 흠뻑 들어와서 생활 걱정 없게 된다는 것이란 얼마나 좋은 일이겠어?
그렇지?
― 헨리 입센의 《인형의 집》 중에서, ‘인형의 집’에 안주하던 때 노라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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