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의 막을 여는 건 아마추어 키보드 연주자인 '소시민' 존이다. 회사에선 그저 일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일상에서의 영감을 작곡으로 푸는 남자. 하지만 그가 느끼기에 자신의 음악은 형편없었다. 트위터로 익명의 대중을 향해 제 공상을 지껄이는 게 낙이라면 낙이다.
그리고 영화는 현대 소시민 존이 무의미한 이름의 인디 밴드 'The Soronprfbs'의 보컬이자 주축인 프랭크로 인해 '급' 캐스팅되는 영광을 누리며 본격화된다. 존은 프랭크의 미심쩍은 가면탈 안에 어떤 표정이 있는지도 모른 채 밴드에 들어가기로 한다. 다니던 직장마저 때려치고 일원이 된 그는 프랭크에게 매혹돼갔던 것이다.
가면탈 쓴 '힐링' 교주
존을 캐스팅하자마자 앨범 작업을 명분으로 도시 밖 숲으로 간 밴드. 이는 프랭크를 동경하는 마네킹 성애자 미친 놈 '돈'과 프랭크를 집착적으로 사랑하는 미친 년 '클라라' 등을 통해 오직 천재 '프랭크'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 안에서 신입인 존은 특히 클라라에게 극심한 경계를 당하며 고부갈등을 겪는 며느리 못지 않은 수모를 당하는데, 그녀는 존의 음악적 재능을 깎아내리며 프랭크의 곁에 얼씬말라 위협한다.
그럼에도 존은 견딘다. 프랭크에겐 남다른 재능이 있으니까. 그처럼 음울한 어린 시절의 "한계"를 넘어 자신 또한 예술로 승화시키리라, 다짐하는 존에게 프랭크는 롤 모델이다. 존의 꿈은 부풀어만 갔고 음악이 '완결'돼간다는 환상 역시 부피를 더해갔다. 프랭크와 함께 온 숲은 그야말로 '힐링'의 세상이었다.
― 한데 얼마 안가 힐링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음악적 유능' 뒤에 '세속적 무능'이 돋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곧 숲 속 별장의 세를 못내 쫓겨날 위기를 맞은 밴드.
비록 도시 외곽이라 해서 자본의 자유까지 얻은 건 아니었다.
이 난관에 프랭크는 별장의 예약손님에게 기꺼이 자신을 희화화한다. 손님 또한 가면탈 쓴 그대로 '힐링'해준 셈이다. 이에 본래 자신들의 휴식처였던 자리를 두고 분노했던 손님은 울다가 웃으며 밴드를 위해 자신들이 떠나준다. 떠난 뒤, 밴드는 손님을 욕하며 재차 음악작업에 몰두한다. 힐링은 순간에 불과했다.
키보드의 역할
한편 존은 점점 불만을 갖기 시작한다. 프랭크조차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주지 않았고, 밀린 집세는 경제적 사정이 되는 존 혼자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불만이 작업의 완성과정과 같이 맞물려갈 때, '프랭크가 될 수 없음'에 좌절했던 일원 돈이 자살한다. 프랭크와 똑같은 가면탈을 쓴 채 목을 매달아 죽은 그에게 프랭크는 되뇌었다.
"너는 최고의 키보드 연주자였어."
별장을 예약한 장본인이었지만 돈이 없어 끙끙댔던 돈은 마침내 자신의 롤 모델 프랭크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허나 그리 말한 것 치고 프랭크는 무심했다. 화장 뒤 남은 돈의 뼛가루를 땅콩가루와 헷갈린 것이다. 역시, 힐링은 순간에 불과하다).
그즈음 돈의 후예이자 현 키보드 연주자인 존은 이제 프랭크를 위시한 밴드 자체의 유명을 꿈꾸기 시작한다. 트위터와 유튜브로 선보인 무의미의 밴드 'The Soronprfbs'의 음악이 드디어 저명한 락 페스티벌에 초대된 바, 존으로서는 음악에 대한 첫 자기증명 기회가 왔다. 그는 이제 곡 전체의 음을 조율하는 키보드 자체가 된듯 밴드의 중간자이자 매니저를 자처한다.
유명해지자. 하여 공적으로 인정받자.
소시민이었던 존은 점차 프로에 가까워져가는 것 같다. 존은 밴드의 중심 프랭크를 리드해 페스티벌 참가를 강행한다.
'미친 년' 클라라의 비틀린 사랑?
존의 강행군에 프랭크는 점점 야위어갔다. 큰 무대를 앞둔 그는 사회공포증에 다름없이 우왕자왕하게 됐고, 그를 지켜보던 클라라는 중간자 존을 저주하기에 이른다. 본래 누가 어떻게 지켜보든 오직 '마이 웨이'만을 고집했던 그녀에게 존은 프랭크의 개성을 해치고 아프게 하는 악에 불과했던 것. 마치 극성 어머니와 같이 무조건적으로 프랭크를 보호하려던 그녀였다.
프랭크를 향한 클라라의 무한한 사랑은 결국 존에게 칼부림까지 하도록 추동했다. 그녀는 신고당해 무대에 설 수 없게 됐고, 이와 함께 더욱 야위어가는 프랭크를 본 다른 일원들조차 밴드를 탈퇴하는 지경에 이른다.
'큰 무대' 앞, 무력해지는 잉여
그러나 클라라 못지 않은 고집으로 존은 프랭크와 단 둘이 락 페스티벌 무대에 선다. 온갖 세트와 사람들이 모인 큰 무대에서 존이 좀 더 대중적으로 편곡한 프랭크의 곡이 연주된다. 허나 얼마 안돼 공연은 "음악이 너무 구려…." 라는 프랭크의 한 마디 포기로 끝나버린다.
본래 밴드 'The Soronprfbs'는 그 이름에서 보이듯 '배설의 미학'을 지향했다. 무의미한 단어들의 배열. 난해한 것처럼 뵈지만 실은 리듬이 주는 혼란에 자연스레 몸을 실을 뿐이었던 퇴폐적 음악. 단지 사회 바깥서 숲 속 별장과 같이 '날 것이면서 날 것이 아닌', 애매한 소리를 내보일 따름인 비주류.
― 그것이 바로 가면탈 쓴 교주 프랭크와 밴드의 음악이었기에, 무의미를 의미 있는 양 보여야 하는 '큰 무대'는 단지 "구린" 회피 대상에 그쳤는지 모른다.
'정상' 밖에서야 의미 있는 '괴짜의 미학'
이윽고 프랭크는 존을 떠났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던 차 격앙된 감정에 존이 프랭크의 가면을 억지로 벗기려 했고, 교주 프랭크의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가했던 것이다. 중간자 존에 의해 그렇듯 가면탈 없이 세계를 직접 대면할 수밖에 없게 된 프랭크는 끝내 도망쳐야 했다.
이후 와해된 밴드 일원들끼리 클라라를 주축으로 후미진 술집에서 공연함을 안 존은 트위터로 수소문해 프랭크를 찾아낸다. 프랭크. 그는 그의 고향 집에 있었고, 가면탈을 벗은 그의 실체는 볼품 없는 외모의 괴짜였다. 존과 대면한 프랭크의 '평범한' 부모님은 본래 화목한 가족이었으나 어릴 적 프랭크에게 파티를 위해 가면을 만들어준 게 '이렇게 된' 원인이 되었다 말한다.
그러나 존의 예상과 달리 교주 프랭크는 단지 '언제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을뿐, 어떤 특정 계기로서 예술적 '고통' 따위는 없었다. 다만 음악에 보였던 관심과 재능이 오히려 그를 어린 아이와 같이 (퇴화하도록) 만들었다. 요컨대, 프랭크의 아버지가 전한 말에 따르면 "아무 일도 없었다. 그에겐 정신적인 병이 있다."
화목한 가족, '정상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면탈을 준 게 문제였다는 아버지의 말, 재능이 그의 시간을 느리게 만들었다는 어머니의 '평범한' 태도. 이는 결국 프랭크가 누구라도 상상할 수 있는 정상 가족에 소속됐지만 그 안에선 단지 외면된 잉여였음을 보여준다.
허나 그럼에도 프랭크는 가면 뒤에 숨어 세상에 무의미한 음악을, 괴짜스런 자신의 '자연스레/죽어가는' 음악을 내비춰왔다. 이는 보잘 것 없는 인물인 자신일지라도 음악만은, 진실한 '자연스러움'으로서 비틀린 자신의 정체성의 울림만은 알아주길 바랐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비록 퇴폐성에 기댄 배설에 불과했던 그의 음악은 가면탈이 벗겨진 뒤 행보에 따라 다행히도 (현재진행형이 아닌) '흑역사'에 그칠 수 있었다. 즉 프랭크는 비록 '정상 가족'에 걸맞진 못한 한편 예술에 기생하는 무의미한 방식의 삶을 택했었지만, 그러한 삶과는 또 다른 길 ― 요컨대 밴드에 다시 합류해 "I Love You All(너희 모두 사랑해)." 라며 의미 있는 '솔직한(frank)' 음악에 새롭게 취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존은 후미진 술집에 울려퍼지는 변화한 그들의 소리에 저 또한 미소지으며 떠난다.
<프랭크>가 프랭크인 이유
'(때로는 남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솔직한'.
이 영화는 제목에서 보이듯 꽤 불편한 부분들을 건드린다. '힐링'이나 예술적 고통이란 건 정상 아닌 자의 자기방어에 연관한 단순 허구였고, 허구 위에 가면탈 쓴 교주 또한 소위 '페르소나'를 쓴 채 도취적 특별함을 추구하는 우리네 소외된 이면을 노출시키는 것만 같다.
그뿐인가. 벗겨진 가면 아래 상처를 치유하고자 돌아간 프랭크의 '정상 가족' 속 어머니는 있는 그대로의 그를 직시해주지 않았다. 과거의 그는 "잘 생긴 얼굴", "사랑스러운 피부"를 가졌었다 회상한 그녀는 그의 음악에 대하여는 어떠한 미사여구도 부여해주지 않은 것이다. 이는 프랭크의 외면이 아닌 내면의 '진짜 상처'를 알고 바깥 시선 따위 신경끄라던 클라라의 집착적 사랑과 대비되지 않을 수 없는 지점이다. 괴짜로서 '문제' 있는 그를 인정해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따뜻한 인상의 어머니가 아닌 그의 배설로서 무의미한 음악이라도 좋아해주었던 '미친 년' 독설가 그녀였기 때문이다.
무엇이 진실한 사랑인가? '정상 가족'의 배려 속에서도 어쩌지 못한 프랭크의 정신적 병이 꼭 '문제'인 걸까? 그렇다면 그의 음악과 자기실현은? 그를 전적으로 인정해보려 한 클라라 또한 정녕 '완전히' 미친 년인가? 그들을 지켜보던 나는, 프랭크와 같이 "너희 모두 사랑해."라고 말할 만큼 솔직한가? 등등.
영화는 장면 곳곳 이처럼 다양한 질문들을 볼 수 있도록 프랭크를 지켜보는 중간자 존의 시선을 유지했다. 회사에선 그저 일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일상에서의 영감을 작곡으로 풀었던 소시민 존 말이다. 현실의 챗바퀴 속에서 무의미한 음악에 허위의식으로 즐겨 안주했던 그의 모습은 점차로 '가면탈 뒤 진심들'을 알아가며 '있는 그대로에 대한 긍정'에 참여하게 됐다.
클라라가 프랭크를 향해 표현했던 사랑과 프랭크가 밴드 일원들을 향해 "너희 모두 사랑해." 라고 노래한 장면 등은 존의 시선을 경유했음에도 여전히, 어딘가 불편하다. 날 것 자체로 내보인 누군가의 마음들은 페르소나에 익숙한 현대인에겐 되레 작위적이며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을 듯도 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련의 이야기가 어째서 내게는 보다 '힐링'으로 느껴지는 걸까.
언제부터 솔직한 게 불편한 것이 되었는지.
그 불편함이 어떻게 '힐링'으로 느껴지게 된 것인지.
'지난 날을 회고해보라.'
영화를 보며 자연 벗겨진 나의 가면탈이 속삭이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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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웹진 '문화다'에 올렸던 글
링크 -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reader_write&ps_boid=16&ps_m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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