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삶 정연(精硏)하기-사랑: 김연수론
1. 인간소외라는 원죄(原罪)
김연수의 문학은 ‘현대사회에서 문학이 향해야 할 길’이라는 대주제에 닿아 있다. 그의 출발은 1970년생으로서 청년기인 1987년 이후 목도한 국내 군부독재의 몰락, 국외 냉전 시대의 종결 등 시대를 바라보는 인간집단의 공통된 ‘합일정신’들의 붕괴 ― 바로 그 포스트모던적 균열에서 태어난 게 자신이 속한 세대라는 자각에서 비롯한다.
자기가 선 세대에 대한 김연수의 자각은 이른바 써야 했고, 쓸 수밖에 없었던 시대 내지 세대라는 “거대한 사회적인 가면”을 직시하는 데 있었다. 이는 곧 그의 데뷔작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가 스승은 이끌고 제자는 따를 뿐인 일방적 관계, 하루키 문학 등 비한국적 문화에 대한 동경, 1980년대까지의 한국 군벌 사회 등 공통적으로 모든 형태의 권위주의를 향한 부정과 맞물려 있다. 즉 김연수는 이전 세대의 정치적 역사는 경험할 수 없는 과거 성역이며, 그에 후세대는 변절자가 아닌데도 변절자처럼 자타(自他)에 죄의식을 짊어진 채 산다는 87년 체제 이후의 세대의식을 집어냈다.
이처럼 합일정신이 해체된 뒤의 세계에는 일견 다양한 정신들이 산재하다 못해 조각난 듯 보인다. 이는 에필로그 〈좌담회〉에서 작가로서 명시한 김연수의 진솔한 고백에도 드러난다. 등장인물 간 통합에 신경 썼다기보다는 “다양한 화자의 존재와 그 존재의 드러냄에 치중”했기 때문에 화자나 작가 자신의 의식이 “분열”돼 있다는 대목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개인들이 통합되지 않고 분열된 채 사는 데 대한 그의 역발상이다.
분열의 원인에는 자본주의가 자리하며 이에 아이러니하게도 긍정적 양면으로서 과학 또한 가능하다는 주장인데, 과학을 “풍문으로서가 아니라 진짜 과학으로 공부한 첫 세대”라는 표명이 그것이다. 곧 87년 체제 이후 민주화와 세계화로 물밀 듯 유입한 자본주의를 체화하며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해, 김연수는 미시사회 속 자신과 그 미시사회를 지탱하는 거시세계를 스스로 성찰하는 자기의식이야말로 과거 세대들과의 “변별성”이며 과학적 대안이라 본 것이다. “세대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곳에 서 있게 마련”이므로, 너무 많은 죄책감에 못 박혀 살 필요는 없다며.
요컨대 김연수는 작금의 자타 분열로 인한 인간소외라는 원죄(原罪)의 근간에는 역설적 양면으로서 과학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는 합일정신의 해체 뒤에 오는 환멸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필연적 분열을 마주한 인간의 ‘주체성 회복’으로서 자기성찰을 잇자는 작가정신이다.
2. 추억 정연(精硏)으로서 문학의 과학
그런데 그의 주체성 회복으로서의 과학은 흔히 아는 자연과학이라기보다 ‘과거에 대한 추억 정연(精硏)’의 문학 양식을 취한다. 이 같은 경향은 자타 분열과 인간소외를 뜯어보았던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이후 단편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회고하는 소년 화자 중심의 작품들이 주로 실린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는 국가교육제도 내 스승과 제자, 학생들 사이 권위주의 관계를 담백한 문체의 청소년소설로 그려냈다.
1984년의 중학교는 ‘자율’을 교육 슬로건으로 걸지만 아이들에겐 폭력의 산실이었다. 공교육 정책에 충실한 구 ‘새마을주임’ 담임 조 선생의 훈계와 이유 없는 체벌에도 그저 인내하던 원재는 인근 고아원 소속 자퇴생들과 달리 마지막까지 꿋꿋이 학교에 다니는 고아원생 태식에 감화된다. 조 선생과 조 선생의 후광을 등에 업은 반장 경호, 이 ‘일그러진 영웅’ 두 명의 학교폭력에 저항한 유일한 사람이 태식이었기 때문이다.
태식은 자기와 비슷한 꿈을 꾸는 원재에게 둘 다 원하는 대로 미래 “과학자”가 되자고 독려했었으나, 이미 중퇴한 고아원생 친구들과 어울리다 반장 경호와 싸웠다는 이유로 조 선생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한다. 이 일련의 사건을 지켜본 유약하던 원재는 태식을 구하고자 학교폭력으로 조 선생을 경찰에 신고하지만, 조 선생과 경호는 태식이 고아원생이며 어울리는 고아원 친구들이 불량아라는 이유로 도둑이라는 거짓된 사회적 낙인을 찍어버린다.
역순행적 구성을 적절히 취한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건 주인공인 두 소년 원재와 태식 모두 “과학자”를 꿈꾸는 상호 조력 관계라는 점이다. 이는 핵심어에 관련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에서 인간소외의 극복 대안으로 ‘과학’을 집었던 것과 유사한 부분으로,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에서의 어린 세대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원재와 태식 역시 집단 내 입지가 미약해 제 처지를 슬퍼하는 장면이 나온다는 데서 주목할 만하다.
김연수는 이 어린 미래 “과학자”들을 분명히 위로한다. “제 몸이 아름다운 줄도 모르고 소년들은 슬퍼한다.”라며, 부디 이 소년들이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 어떤 꿈이든 버티어 살아가길 지지하는 것이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출간한 또 다른 소설집의 표제작 <스무 살>의 주인공 또한 스치듯 과학을 이야기한다. 어릴 적 천문대에서 별 보고 책 읽는 게 꿈이었기에 대학 입시에서도 천문학과를 지망했던 청년 ‘나’의 스무 살 경험들에 대한 회고소설이다. 여기서 ‘나’는 단순 명예욕 등으로 천문학자가 되길 꿈꾸었다기보다 다만 별 보기를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꿈꾸었음이 드러난다.
그러한 ‘나’와 교우하는 또 다른 청년 재진은 고아인 자신을 입양, 사랑해준 부모님에 대한 보답으로 본래 자신의 꿈과는 다른 법학과에 진학했다. 둘 다 소년 시절 각자 꿈꾸던 것에서 벗어나 스무 살, 처음 사회를 겪으며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지만 이 우회하는 삶들은 다만 추억이라는 같은 궤 안에 생생히 자리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나’를 중심으로 둘러싼 세계에 대한 기억을 면면이 정연하는 어린 인물들의 타인 관조·공감 과정은 이를 읽는 독자로 하여 ‘누구에게나 추억은 있다’는 사적 역사의 진리를 겪게 한다.
3. 팽창하는 인정투쟁-역사 정연
하면 김연수 문학에 있어 과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이는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를 포함한 초기 작품들에서와 달리 2000년대 장편소설 《꾿빠이, 이상》과 《밤은 노래한다》를 통해 보다 진전해 제시된다.
《꾿빠이, 이상》
《꾿빠이, 이상》에서는 실증적 과학과 달리 문학 또는 문화에서의 진위 판별이 결국 인간의 의지에 있다고 계속 강조된다. “진짜라고 믿는 자에게 그 세계는 진짜처럼 보이고 가짜라고 믿는 자에게 그 세계는 가짜처럼 보인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점은, 김연수가 이상을 평생토록 모방한 노인 서혁민 그리고 일련의 진실을 알면서도 이를 감추고자 하는 재미교포 문학연구자 피터 주와 같이 거짓을 행동한 인물들을 작품 전면에 세웠다는 점이다.
김연수는 이상을 모방함으로써 이상 그 자체가 되길 욕망하였던 서혁민의 결핍을 반복해 보여준다. “나는 일흔세 살의 노인, 그 사내는 스물일곱 살의 청년”이라고 이상과 자신의 실존적 괴리를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내게 이상의 작품에 버금가는 시를 쓰는 일과 이상의 미발표 유고를 찾아 헤매는 일은 언제나 같은 의미”라고 믿는 서혁민이다.
유고를 번역하듯 창작할 테다. 유고의 공개와 동시에 내 작품도 공개될 것이다. 아, 나는 이상이 될 수 있으리라.
이처럼 그는 이상의 미발표 원고를 참조해 사칭하는 것을 생애 목표로 삼은 가련한 자다. 스스로 오롯한 정체성 형성을 거부하고 ‘권위로서의 이상 문학’과 자기가 합일치하길 바랐다. 주체는 언제고 불완전하며 분열·소외되게 마련인데, 애초 ‘완성된 이상-문학’에 합일치한다면 그러한 필연적 한계를 극복 가능하다 믿은 것이다. 어떠한 사회적 인정투쟁도 거부한 채 단지 홀로 이상을 모방·사칭하는 거짓 정체성을 추구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그는 “이상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라면 김해경은 죽었어야 했다.”라며 공적 정체성으로서 이상만을 인정하고, 사적 정체성으로서 김해경 개인을 삭제하는 사회에 적극 동조해 죽는 순간에조차 몰래 이상을 따라해 죽는다.
한편 김연수는 이상의 유고에 대한 진위 판별을 둘러싼 인물들 각기의 정체성 충돌, 자기만의 고집스러운 진위 판별 방법들, 무엇이 더 옳은 방법인가 결정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타인을 무시하며 깎아내리는 정치적 경합 등 개인마다 서로 다른 진실에의 접근에 관한 사회적 인정투쟁이 얽히고설켜 있음도 보여준다.
특히 부모가 숨긴 출생의 비밀 ― 재미교포 한국인 가정에 입양된 중국인으로서 자기의 생물학적 근간을 우연히 알게 된 뒤 한국문학 전공, 즉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선택한 피터 주는 한국에서 만난 연구자 최두익 등에게 이방인 차별을 계속해 경험한다. 이에 피터 주는 자신만 알고 있는 이상 문학에 관한 진실을 은폐하고, ‘한국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데 전심을 다 하기로 결정한다. 인정투쟁에 임하는 그의 방식 역시 서혁민과 같이 거짓인 바다.
그러나 이를 읽는 독자는 과연 피터 주를 과연 100% 비난할 수 있는가 자연히 의문을 갖게 된다. 애초 그가 양부모처럼 ‘되기’로 마음먹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허락해준 곳은 아무 데도 없었기에. 피터 주를 통해 독자는 비밀에 부쳐진 거짓이 단순히 거짓을 행하는 개인이 절대적으로 악해서라기보다, 그의 정체성을 그가 선 사회가 허락하느냐 마느냐 하는 인정투쟁 문제로 상호 부정적 교류한 데 의한 것임을 목격한다.
요는, 진실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진실에 닿는 데엔 이를 쫓는 여러 정체성들 간 내·외적 갈등으로서 인정투쟁 또한 단연 개입한다. 여기엔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다. 모두는 스스로 ‘가면’을 쓴 채 서로를 손가락질하는, 진실을 추적하면서 거짓을 만들기도 하는 분열된 ‘죄인’이다.
그러면서 김연수는 이상의 데드마스크와 유고에 관한 진실 추적의 서문을 열며 취재 명목으로 김연 기자를 사칭한 김연화를 빌려 사랑을 말하기도 한다. 그는 불륜에 관해 아내 정희를 ‘진짜’ 사랑하느냐 묻는 연인의 남편에게 모른다고 답했다가, 마지막에는 “다만 무한한 어떤 것 앞에서는 존재 그 자체가 중요하지,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애매”하다고 한다. 뜬금없이 언급되는 듯한 이 ‘사랑론’은 진짜냐 가짜냐 정의하기 어려운, 그러나 ‘의지를 동반하므로 존재하는 어떤 진실’이다. 이상에 대한 진실 찾기처럼 개인들에 있어 오리무중이나, 분명히 느끼는 고로 의지적으로 추구하는 실재 말이다.
이처럼 진실을 둘러싼 팽창하는 인정투쟁 과정으로부터 일견 비껴간 듯 보이는 김연화의 짧은 사랑 이야기에서조차, 독자는 그저 존재한다 느끼므로 찾아 나서는 ‘의지’의 영역만이 확실함을 알게 된다.
《밤은 노래한다》
《꾿빠이, 이상》 후 얼마간 지난 뒤 발표된 장편 《밤은 노래한다》에서는 ‘민생단 사건’이라는 역사에의 세밀한 정연이 한 인물의 사랑과 뚜렷이 결부해 나타난다. 폭력적 식민지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렸던 일제강점기, 전체주의의 세계에서 제대로 조명조차 되지 않았던 민생단 사건이 주인공 김해연의 사적 추억과 공적 역사에 관한 참여관찰자적 정연으로써 작품 내리 그려지는데, 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원동력은 오로지 김해연의 사랑이다.
그런데 그 사랑의 대상인 이정희는 김해연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정체가 발각돼 자살하기까지, 일제의 기밀을 파헤치는 독립운동 정보 스파이였다. 이정희의 죽음 이후 일본 경찰에 취조받던 김해연은 그녀와의 사랑을 정치적 공작이라 의심받고 자신이 선 세계가 “완벽하게 가짜인 세계”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로 인한 충격에 김해연은 실어증을 앓다가 우연한 기회로 이정희처럼 독립운동의 가치를 느끼고 그에 헌신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도 얼마 안가 독립운동가들 사이 집단적 배타의식 및 상호 낙인의 부정적 인정투쟁으로서 민생단 사건에 휩쓸리고 만다.
그럼에도 김해연은 마지막, 바라 마지않던 진실을 찾아낸다. 바로 이정희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편지 ― 김해연을 만나기 전까지 이정희 자신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고백하는, 스파이라는 공적 정체성이 아닌 사적 정체성에 의해 김해연을 사랑한다고 전하는 이정희의 편지였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 배신자 격 인물인 최두익의 중간전달로 가능했는데, 증오보다도 사랑이 더 컸던 까닭에 최두익을 인간 대 인간으로 상대한 순간에라야 김해연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 일련의 시기에 있어 시작점, 요컨대 이정희와의 관계를 비로소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밤은 노래한다》는 개인의 타인에 대한 절실한 관계욕구, 즉 어떠한 외재적 조건도 개입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의지가 있어야만 배타심이나 증오에 빠지지 않은 채 진실에 도달 가능함을 역설한다. 이는 《꾿빠이, 이상》 속 인물들이 자타 분열되어 상호 소외가 난무하던 데 따른 모방·사칭, 과잉된 사회적 인정투쟁으로 진실에 이르지 못했던 것과는 사뭇 대조된다.
《꾿빠이, 이상》의 인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정체성만이 중요한 ‘서로가 서로에 죄인’이었고, 《밤은 노래한다》의 김해연과 이정희는 일제강점기 민생단 사건이라는 거대한 합일정신의 대척점에서, 비록 어김없이 속고 의심하는 분열된 죄인들이었지만, 그들 자신의 의지적 사랑 곧 공감적 합의로서의 진실을 적시해 속죄한 인물들이다. 여기서 사랑이란 ‘추억·역사 정연하기’로서 문학의 과학에 관한 심지에 매한가지다.
그리하여 독자는 다시,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의 에필로그로 돌아가 곱씹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떠한 의도도 세계는 바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계는 그것을 사랑하는 자들의 몫입니다.
“의도”의 함정에 빠진 인정투쟁에서 한 발짝 벗어나 사랑할 줄 아는 자들에게야말로, 세계는 진실을 보여준다.
4. 진실의 실마리, 사랑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에서 《밤은 노래한다》까지 김연수는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상호 갈등·불신함에 따라 분열되면서도 관계하는 즉 인간소외라는 ‘원죄’를 짊어진 존재임을 절대명제로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처음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에서 언급하였던 세계에 대한 정의(“세계는 그것을 사랑하는 자들의 몫”)를 여러 작품에 걸쳐 기억 정연하기라는 문학의 과학으로 점차 심화해 보여주었다.
하여 이 같은 심화과정은 마침내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어찌 보면 가벼운 로맨스 소설과도 같은 제목의 단편집을 내며 공고히 된다.
표제작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주인공이 신도시 도서관에서 군인, 교사, 변호사 등 다양한 계급에 더해 중학생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대가 참여하는 ‘함께 시를 읽는 사람들’ 모임에서 한 할머니를 만나며 시작된다. 그즈음 사랑하던 여자와의 관계에 방황하던 주인공은 젊은 시절 국어교사였던 할머니가 지켜본 한 제자의 사랑 이야기에 메타세쿼이아를 대입해 이해한다.
공룡과 함께 살다가 빙하기 절멸했던 메타세쿼이아는 1943년 화석으로 발견된 후 재번식에 성공한다. 이후 가로수로 심심찮게 자리한 그것은 할머니가 이야기해주는 죽은 제자의 사랑과 비슷하다. 비록 신도시 어느 한 곳에 “세계의 끝”이 되어 묻혔지만, 끝내는 그를 이해하는 누군가에 의해 재발견되는 이야기. 죽은 듯 보이나 사실은 살아서 타인을 감화하는 이야기 자체가 그의 메타세쿼이아 같은 사랑인 바다.
이에 감명한 주인공은 사랑하던 여자를 이해하고자 그녀가 좋아하는 소설을 읽기로 결심한다. “십 년은 고사하고 당장 내년 이맘때는 어떨지도 모르고.” 끝이 어떨지도 모르면서, ‘계속 사랑하기’로 말이다. 이는 결과에 집착하는 사랑이 아닌 타자와 함께하는 과정을 계속하기로 선택하는 사랑이다.
이처럼 개인이 관계라는 계기를 통해 자기와 타자를 동시에 통찰하고, 궁극적으로 사랑을 지향하는 모습은 이른바 ‘합류적 사랑’에 맞닿아 있다. 서로 다른 두 물줄기가 어느 순간 합쳐져 하나의 물줄기로 흐르듯 상호 대등한 입장에 자연히 서는 합류적 사랑(Confluent Love)은 세대, 성별, 계층 등 어떠한 사회적·외재적 조건도 목적하지 않고 이어가는 개인 대 개인의 ‘정서적 민주주의’ 전반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김연수는 데뷔 이후 이 합류적 사랑을 여러 작품 속 인물과 장면을 통해 지속 변주해왔다. 특히 비교적 최근작인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의 경우, 디아스포라 문학 형식을 빌려 사회적 조건에 따른 인간소외 및 결핍의 극복을 합류적 사랑의 실패와 성공을 대비한 이야기의 교차로써 섬세히 풀어 돋보인다.
자신을 낳아준 근원이자 태어난 즉시 마주하는 첫 번째 ‘타인’ 친엄마를 찾아 나서는 한국인 입양아 카밀라의 여정을 그려낸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서는 보다 정밀한 추억·역사 정연하기가 드러난다. 여기엔 인물들 간 ‘사랑의 작대기’가 다수 읽히는바, 이를 정리하자면 매우 복잡다단하다.
주지해야 할 것은 이로부터 가족, 연인, 친구, 심지어 생면부지의 타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 중 인물들로 하여 삶의 전환을 맞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합류적 사랑’의 성공 전형을 보여준다. 가령 카밀라가 글쓰기로 자기성찰을 시작하고 친엄마 정지은을 찾는 데 일조하였던 연인 유이치는 카밀라에게서 ‘작가적 정체성’을 발견한다. 그녀가 “고독”을 즐기는 고로 자신을 지키고자 어떤 “투쟁”도 마다하지 않는 한편 삶에 비추어 “쓸 이야기”도 많다는 것이다. 카밀라는 유이치와의 사랑을 통해 작가로서 자기정체성을 새로이 확인·구축해간다.
하여 자신이 태어났다는 한국의 진남에 간 카밀라였으나, 그녀가 마주한 것은 “동정적이면서도 냉담”한 타자의 의미 없는 ‘가면’들이었다. 카밀라의 친엄마 정지은이 다녔다는 진남여고에 수소문해봤지만 교장 신혜숙은 지나치게 냉담할 뿐이다. 그러나 카밀라는 굴하지 않고 죽은 엄마의 역사를 찾아 2012년의 진남에서 1984년의 진남의 발자취를 역추적한다. “진실은 개개인의 욕망을 지렛대 삼아 스스로 밝혀질 뿐”이라고 깨달으며. 또, 어떤 타인과의 인정투쟁 시비도 마다하지 않으며.
그러나 그녀가 찾은 유일한 진실은 자신의 한글 이름이 정희재라는 것이다. 이외에 그녀의 아버지가 누구인가에 대한 진실을 찾았을 때 그녀가 도달한 맥락은 총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자신이 엄마가 남매 근친상간을 통해 낳은 아이일 수 있다는 것, 두 번째는 진남조선소 노동투쟁 당시 동료들의 희생에 죄책감으로 자살한 외할아버지와 그 충격으로 엄마가 실어증을 앓던 때에 담임교사 최성식과의 문학적 교감에서 자신을 임신했을 수 있다는 것, 세 번째는 엄마를 통해 아무도 모르게 가정사적 고통을 위로받은 남자 ― ‘바람의 말 아카이브’의 현 운영자이자 과거 진남조선소 사장 아들이었던 이희재를 엄마 역시 서로 사랑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김연수는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열린 결말로 의도해 마무리 지었다. 카밀라가 도달할 진실이 무엇일지는 그들 이야기의 끝까지 도달해보지 못한 독자로선 도무지 알 수 없다. 이는 다만 근친상간, 사제 간 연애, 노동/자본 계급 갈등 밖 자녀들끼리의 밀애 등 여러 금기에 휘말리듯 자살한 정희재의 친엄마, 1984년의 정지은을 과연 어떤 누가 당대 혹은 세대의 맥락을 다 알고서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성찰하게 할 따름이다.
나아가 독자는 이로써 김연수가 진실 찾기의 보편적 방법으로 ‘기억 정연하기’라는 문학의 과학을 택했다는 점,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물들 간 인정투쟁이 개입하며 “바람의 말(풍문)”로써 개인은 서로가 서로에 죄인이 된다는 점, 이를 극복하는 건 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구축하느냐 하는 즉, 어떤 분노나 편견조차 이겨내는 의지로서의 사랑을 지속할 용기가 있느냐에 달려있다는 점을 깨닫기도 한다.
요는 김연수의 문학이 과학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귀결돼왔다는 것이다. 개인은 상호 분열 또는 불신이라는 인간소외의 ‘원죄’를 사실로 명확히 직시하고 난 뒤에라야 타자와의 합류적 사랑을 통해 비로소 원죄를 넘어선다. 분열된 주체와 분열의 부산물로서 타자를 향한 인정투쟁·낙인의 폭력이란, 주체가 사랑으로 스스로 극복해야 할 필연적 전 단계에 불과하다.
한 사람이 인정투쟁 안에서 정체성 분열을 계속 겪으면서도 재차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이유는 바로 사랑이라는 ‘사적 평등에 의한 교류’의 공통된 열망 때문이다. 따라서 김연수의 작품에 등장한 인물들은 축적된 체험을 자기 내지 자기가 선 시대에의 정밀한 연구 곧 ‘추억·역사 정연하기’를 행동하는 인물로 그려져 왔다. 본디, 사랑하려는 자들은 자신을 둘러싼 관계와 세계를 투명하고도 조심스레 바라보고자 하게 마련이므로.
김연수는 어쩌면 그 자신의 ‘사랑론’을 일찍이 구축했을는지 모르겠다. 2003년 출간한 중편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가 있는 까닭이다. 제목부터 사랑을 논한 이 작품은 삼각관계 모티브에 한 여자의 ‘과거’ 사랑과 또 다른 ‘현재’ 사랑 간 대비로 사랑이란 무엇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찰해본다. 작중 인물들은 주로 연인들 간 사랑을 이야기하는 듯 보이지만, 다음의 대목에서 김연수가 비단 그것만 일컬은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랑을 한다는 건 그 한 송이 꽃을 통해 1천 송이의 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통해 자신도 1천 송이의 꽃이 되는 한 송이 꽃이라는 사실을 납득하는 일이다.
흐르는 물과 같이 우연스레 살다가, 어쩌다 만났거나 만나고자 욕망했던 타자에 때론 실망하다가도, 끝내 갈라진 사이를 넘어 타인과 진실을 공유하고파 하는 인간 보편의 의지 ― 사랑. 그러한 진실의 실마리로서 사랑 이야기, 김연수의 문학은 서로가 서로에 소외된 죄인이기 십상인 작금의 우리에게 더욱 가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작가 김연수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기다려지는 건 아마 이런 연유에서일 테다.
문학동네: https://www.munha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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